지리산2009. 6. 30. 17:29

2005년 이후
지리산 종주를 위한 배낭 꾸리기 5회째,
이젠 가져갈 물품 목록을 작성하지 않아도 짐이 꾸려집니다.

지리산 케이블카 사건 '덕'에 (2009/06/12 - [지리산] - 지리산 능선을 지켜주세요)
잊고 있던 지리산이 마음 속에 다시 들어오고 나서,
누군가가 운동권 대학생 같다고 했던(미용실 안 가고 기르기만 한다고 -_-) 긴 생머리를
구불구불 말아버리고 (며칠 동안 머리 안 감아도 티 덜 나라고 ㅋ)

사용자 삽입 이미지

NIKON D80 / Manual / Spot / 1/125sec / F/6.3 / 35.0mm / ISO-200 / 천왕봉 일출



그동안의 종주 계획 중
가장 긴 일정을 잡고 (4박 5일)
가장 가벼운 짐을 싼 뒤 (카메라 빼고 배낭 멨을 땐 '성공!'을 외쳤더랬음)
가장 무거운 카메라(렌즈가 무려 2개..;;)를 덜컥 얹어서 짐 무게를 확 늘려버리고
장맛비가 올지 모른다는 걱정 속에 출발. (출발 이틀 전까지 입산통제)

감사하게도
비가 오는 시기를 삭 피해가서,
다시 천왕봉 일출과 매일의 일몰, 노고단의 은하수,
그리고 마지막 날엔, 맑은 날은 보기 어려운 운해까지 만나게 됩니다.
이런 경험은,
오직 지리산 종주에서나 가능한 것 같습니다.


NIKON D80 / Manual / Spot / 2/1sec / F/7.1 / 19.0mm / ISO-100 / 노고단대피소, 일몰.



혼자 떠나는 종주는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처음 혼자서 종주를 했던 것도, 첫 종주는 아니었습니다.
한 차례 어렵사리 종주를 성공하고
또 한 차례는 종주를 실패하고
그러고 나서 혼자 떠나기를 과감히 시도.



혼자 떠난 첫 종주 때도 그랬고 이번에도 그랬고
무수히 많은 등산객들로부터
혼자 왔느냐는 질문을 듣게 됩니다. 안 무섭냐고. 대단하다고.


제 경우는 혼자 여행을 잘 떠나는 편이기 때문에
나홀로 종주 산행을 결심하기까지 가장 걱정스러웠던 건 배낭 무게로 인한 체력소모였습니다.
아무래도 혼자 가면 짐이 무거워질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배낭 무게야 '대단하다'에는 포함될 수 있어도
'안 무섭냐'엔 포함되기는 어려운 주제.


 


그래서 곰곰 생각해봤습니다. 대체 무엇이 무서워야 하는 걸까?


NIKON D80 / Manual / Spot / 1/100sec / F/6.3 / 22.0mm / ISO-100 / 천왕봉에서



1. 곰이나 멧돼지
2. 부상이나 조난
3. 도둑이나 강도
4. 성폭행범
.
.
.


설마 1번은 아니겠죠?
곰이나 멧돼지는 가능성이 있는 위험이지만
남자라고 안전할 건 없는 데다가 (2,3도 마찬가지)
확률이 극히 낮습니다.

2번, 부상이나 조난.
여럿이면 핸드폰이 안 터질 때 대피소에 연락을 취해주는 등, 어느 정도 도움이 되겠지만
동행이 있다고 해서 업고 내려와준다거나 그런 건 못 해 줍니다.
이 또한 남자라고 '덜 무서울' 건 없구요,
안전한 산행을 계획한다면 상당부분 해소가 가능한 위험이라고 생각됩니다.
지리산 주능선, 법정탐방로를, 입산통제 기간이 아닌 기간에 다닌다면
무수히 많은 이들과 스치게 되고, 이들은 대부분 기꺼이 도움을 주고자 합니다.
제 경우도, 쉰다고 앉아있는데 지나가며 도와드릴까요, 하는 분도 계시더군요.
혼자 구조대를 불러야 한다면, 500m에 한 번씩 위치표지판이 나오기 때문에
119에 구조요청할 때 위치를 알려줄 수 있습니다.
예비로 호루라기 하나쯤은 배낭에 매달고 가면 좋겠지요.

3번, 도둑이나 강도...
지리산 꼭대기까지 올라와서 누가 그런 짓을...?
이라고 얼마 전까지는 생각했었습니다만
도둑이 있긴 있다더군요. 그래서 세석대피소엔 심지어 물품보관함까지 생겼습니다.
실수로 신을 바꿔신고 가는 경우도 있다네요.
하지만 이것도 여자가 더 위험한 건 아닌 듯합니다. 오히려 반대인 듯.
사실 저는 집 비운 사이에 집에 도둑 들지 않을까가 더 걱정이었다는..;;

4번, 성폭행범.
아마도 '여자 혼자'에 방점이 찍히는 건 이 4번이 아닐까 하는데, (아닌가요?)
이 또한 3과 비슷합니다. 지리산 꼭대기까지 올라와서 누가 그런 짓을...?
지리산 대피소는 대부분 여자방, 남자방을 분리해 주고,
성비가 매우 불균형해서 방을 통째로 분리하기 어려우면 층이라도 분리해 줍니다. (내부는 복층)
대피소에 가면 다들 힘들고 피곤해서 소등(대개 9시경)하기 전부터 코골고 자는 이들이 부지기수인 데다가
새벽엔 일어나자마자 짐싸기 바쁘고
여럿이 한 공간에서 자기 때문에 부스럭대는 것 자체가 상당히 눈치보이는 일이며
능선길에서는 남자든 여자든 자기 몸 하나 건사하는 게 가장 중차대한 일입니다.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제 생각엔, 적어도 산 아래보다는 안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더.. 있나요?
...귀신?
산장 앞 벤치에 누워서 은하수를 바라보다 보면, 귀신은 생각도 안 납니다.


NIKON D80 / Manual / Spot / 1/250sec / F/7.1 / 19.0mm / ISO-100 / 구름이 피어오르는 노고단 정상탐방로


한편으론, 혼자냐는 사람들의 관심을 부담스러워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산에서는 모두들 서로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굳이 혼자가 아니어도
스치는 이들과, 그들이 먹는 음식과, 그들의 장비와, 그들의 소요시간 등등이 다 궁금해집니다.
그 수많은 관심 중 하나일 뿐인 거지요.


이번 산행길에
혼자 종주하는 여자를
최소한 너댓명은 마주쳤습니다.

이젠 여자 혼자 하는 종주, 그닥 특별할 것도 없어 보입니다.


NIKON D80 / Manual / Spot / 1/30sec / F/5.0 / 34.0mm / ISO-100 / 세석, 눈썹달.




그러니 용기를 내세요.
필요한 정보는 널려 있습니다.
충분한 사전조사와 철저한 준비, 그거면 충분합니다.
도처에 위험이 널려 있는 산 아래에서도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잖아요.




- 행여 오해하는 분 있을까 덧붙임 : 종주산행의 기간은 본인의 체력과 취향에 따라 천차만별입니다.
저는 이번엔 4박5일이었지만 2박3일로(3일째는 천왕봉 찍고 하산) 갔었던 경험이 있고, 1박2일로 다녀오신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 '여자 혼자 떠나는 지리산 종주'에 궁금한 사항은 질문 남기시면
경험 범위 내에서나마 열심히 답변 달아 드립니다.*




'지리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서를 쓰지 못하는 꿈을 꾸다  (4) 2009.07.21
異國  (8) 2009.07.09
지리산 능선을 지켜주세요  (10) 2009.06.12
짙푸른 초여름의 능선: 지리산 여행  (17) 2008.06.21
큰일났어요  (13) 2008.04.29
Posted by [Ar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