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보니 치앙마이에 와 있다. 그 유명한 한 달 살기라는 걸 하는 중.
한국의 노동 환경이란 것이 그러하다보니 한 달 이상 치앙마이에 와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퇴사하고 왔거나,
디지털 노마드이거나 아니면 어떤 이유에서든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인 것 같다.
그런 상황이면 한 달이 두 달 되고 석 달 되고 때로는 일 년이 되기도 하는 모양이더라만
나는 어쨌거나 돌아가야 할 날짜가 정해져 있어서, 딱 한 달의 시간만 허락되었다.
한 달 간의 해외 체류가 확정되고는, 브런치를 할까, 유튜브를 할까, 인스타를 할까 여러 생각을 했었다.
출근 안 하고 시간이 남으면 뭐라도 하고싶어지지 않을까 했던 건데,
막상 도착해서 짐을 풀고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잡무를 정리하고 생활을 위한 준비가 대충 끝나고 나니
뭐가 하고싶어지긴 개뿔, 그냥 아무 것도 하기가 싫었다. 아무 것도 하기 싫다는 생각조차 의식하고 싶지 않은 상태가 시작되었다.
처음 온 도시에서 가야 할 곳도 없고 만날 사람도 없지만 딱히 가고 싶은 곳도 없고
하지만 숙소에만 있기에는 뭔가 불안한
계속 움직이던 습관은 몸에 남아있지만, 언제 다시 올지 모를 때를 만났음을 아는 영민한 뇌는 전원을 차단해버렸다.
알람 없이 아무 때나 눈을 뜨면, 커다란 창밖으로 이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산인 도이수텝이 보인다.
대개는 조용하고, 간혹 새소리가 들린다.
게으르게 구글맵을 열고 카페나 마켓 따위를 검색하면서
왜 무언가를 하는 일이 소비와 동의어가 되었는가 회의에 빠진다.
우기의 동남아는, 자연에 가까울수록 벌레가 많고 덥다. 소비 없이 집 밖에 있는 방법을 찾기는 어렵다. 회의 속에서 카페를 고른다.
주섬주섬 아점을 챙겨먹고, 비가 그칠 때를 기다려 골라둔 카페에 가서
한국에서 굳이 싸온 책을 읽고, 하루를 기록하고, 간혹 이 나라의 문자를 써본다. 너무 오래 앉아있었나 싶어지면 저녁 먹으러 갈 때다.
치앙마이에선 미역처럼 늘어져 있어야지, 했지만, 아직 늘어붙어 있을 만한 공간을 찾지는 못했다.
노트북을 하나씩 앞에 두고 몇 시간이고 집중하는 사람들로 가득찬 카페는 도서관에 가깝고
가로수길에 비견되는 님만해민의 카페들은 인스타 갬성 스타일이 많다. 빵을 접시에 이쁘게 담아준 다음, 의자에 놓고 먹으라고 한다.
숙소에서 안 나가고 침대 스프링을 온몸으로 느끼며 늘어져 있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아직은 매일 나가고 있다. 그래야 할 것 같다.
뇌를 끄고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이 도시의 힘인가 하면, 그건 잘 모르겠다.
유럽처럼 인종차별이나 절도 가능성에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아도 되는 건 이 도시의 장점이 맞는 것 같긴 한데,
해외에서 혹은 국내라도 주거지를 떠나 한 달이라는 한정된 시간을 지낸다는 것이,
사람을 너그럽고 초연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긴 한 것 같다.
따지고 들자면 소소한 불편함들이 있고 날씨도 좋지 않지만
내 의지와 무관하게 수행해야 하는 의무가 없고
계속 살 곳이 아니니까 한 발 물러서서 관조할 수 있게 되고
며칠만에 끝나는 여행이 아니니까 내일 하지, 다음 주에 하면 되지, 못 하면 또 어때, 하고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루에 몇 번씩 비행기가 머리 위로 지나가며 소음을 내도 오토바이보다 조용하네 싶고
계속되는 비로 도로가 물에 잠겨도 물 빠질 때까지 기다리지, 한다.
그런 불편함이 내 하루하루에, 내 미래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마음 속의 평화와 적막을 일상에까지 끌고 가고 싶으면서도
일상이 일상이 아니어야만 비로소 그것이 가능해질 것이므로,
나는 매일,
남은 날짜를 세지 않기 위해,
뇌에 전원을 공급하지 않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