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2008. 12. 21. 00:48

오랫만에 꽃다발이 생겼어요.
포장도 영 별로고 크기만 해서
들고오기 불편하다고 투덜투덜댔지요.

가져와서 딱 한 번 물주고
장미가 시들해지기에 미련없이 거꾸로 매달아 말렸습니다.
한동안 진한 장미향이 작은 방을 가득 채우더군요.
그 향기마저 사라져가던 어느날,
노지에서 찬 서리 맞으며 죽어가던 로즈마리를 겨우겨우 살려놨다가
알 수도 없는 이유로 이틀만에 버석하게 말려버린 어느날,



'말라죽으라'고 구석에 매달아둔 꽃다발에서 꽃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들고올 때부터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는 나뭇가지였는데
연둣빛 새순이 여기저기서 삐죽이 고개를 내밉니다.


물 한방울 없이
족히 열흘은 매달려 있었을 텐데.


꽃다발을 해체해보니 밑둥을 둘둘 감아둔 휴지가 아직 축축하고
그 안에서 세상에나,
하얀 뿌리가 돋아있습니다.


나뭇가지만 추려내어 물에 담가줍니다.
하루이틀만에 금새 분홍빛 잔뿌리를 냅니다.
자주 가는 식물 까페에 이름도 물어봅니다.




"용버들"
영문명칭은 Dragon-claw Willow, 용의 발톱 버드나무..
꽃이 용의 발톱처럼 생겼을까요? 아니면 나뭇가지가 용처럼 구불구불해서?
구불거리는 모양새 때문에 고수버들, 파마버들이라고도 한답니다.
물에 담가 충분히 뿌리를 내어 흙에 심으면 잘 자란다고 하네요.



좀 생뚱맞긴 하지만,
문득 오래 전에
비장한 마음으로 만나 위로가 되었던 도종환의 시가 떠오릅니다.

삶을 도무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던 시절.

...

화려한 꽃다발보다도
살아남은 나뭇가지가
비로소 제게 선물로 옵니다.



겨울나기

도종환

아침에 내린 비가 이파리 위에서
신음 소리를 내며 어는 저녁에도
푸른빛을 잃지 않고 겨울을 나는
나무들이 있다

하늘과 땅에서 얻은 것들 다 되돌려주고
고갯마루에서 건넛산을 바라보는 스님의
뒷모습처럼 서서 빈 가지로
겨울을 나는 나무들이 있다

이제는 꽃 한 송이 남지 않고
수레바퀴 지나간 자국 아래
부스러진 잎사귀와 끌려간 줄기의 흔적만 희미한데
그래도 뿌리 하나로 겨울을 나는 꽃들이 있다

비바람 뿌리고 눈서리 너무 길어
떨어진 잎 이 세상 거리에 황망히 흩어진 뒤
뿌리까지 얼고 만 밤
씨앗 하나 살아서 겨울을 나는 것들도 있다

이 겨울 우리 몇몇만
언 손을 마주잡고 떨고 있는 듯해도
모두들 어떻게든 살아 견디고 있다
모두들 어떻게든 살아 이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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