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2008. 8. 6. 12:24
작년 8월,
집에서 에스프레소 베이스의 커피를 만들어보겠다고 모카포트를 지를 때만 하더라도,
연이어 드립퍼를 사고, 핸드밀까지 들여놓을 때까지도,
내 손으로 생두를 볶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었습니다.

그 때 한참 들락이던 온라인 까페에서
많은 회원들이 지금의 저와 똑같은 대사를 치고 있었는데도,
마치 고스톱을 치다가 도박에 빠져버린 이들을 먼 발치서 지켜보듯,
난 저기까진 가지 않겠지.
..그건 또 무슨 오만이었는지.

그리고 일 년 만에,
별다방 접수대에서나 보던 생두를 덜컥 주문하고야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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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비아 수프리모 1kg, 오묘한 향이 나는 생두.

생두는 오래 보관할 수 있고, 보관방법이 까다롭지 않고, 6배쯤 값이 쌉니다.
직접 볶으니 신선한 커피를 마실 수 있구요.

물론 바리스타의 로스팅 기술을 따라갈 수야 없겠지요.
하지만 때론 고급 요리사가 만든 것보다 내 손으로 만든 음식에
더 예민한 감각이 살아난다는 장점도.
(물론 유효기간이 있는 장점일 테지만요. 훗.)

홈로스팅은 방법도 가지각색.
어떤 이는 수망이나 양면팬을 열심히 흔들기도 하고,
멸치국물 내는 통으로 자작 로스터기를 만들어 쓰기도 합니다.
그들의 작품을 보시려면 커피마루
저는 가장 게으른 방법, 뚝배기+거품기 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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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첫 작품입니다. 색도 얼룩덜룩.. 까맣게 탄 콩이 너무 많네요. ㅎㅎ

체를 준비해두고, 뚝배기를 예열합니다.
중불에 맞추고, 생두를 붓고,
처음부터 끝까지, 거품기로 그야말로 열심히 휘젓습니다.
사진 찍을 틈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진 없습니다.

생두를 조금만 넣어서 그런지, 7분만에 탁탁 튀기 시작하더군요.
2차 팝핑도 있다는데, 1차니, 2차니 그런 걸 느낄 새도 없이
그냥 무서운 기세로 계속 튀어올라, 9분만에 불에서 내렸습니다.
불 조절도, 시간 조절도 어떻게 된 건지,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

집 안에 깊은 커피향이 그득합니다.
좀 식기를 기다렸다가, 많이 탄 콩은 방향제용으로 따로 골라놓고,
드립퍼로 한 잔 내립니다.

대개 볶은 지 삼 일쯤 지나야 가장 맛있는 커피를 만들 수 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급한 성미에 일단 한 잔 내려 확인을 합니다.
내가 과연 먹을 수 있는 것을 만들어낸 것인지,
아니면 방향제 원료 1kg을 구입한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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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볶은 커피. 덜 태우려고 약불에 맞췄더니 시간은 두 배 이상 걸렸는데도 좀 덜 볶인 듯.

기대로 가득찬 오백 사십 초 동안 쉬지않고 저어가며 만든 원두는
더없이 사랑스러운 빛깔입니다.

핸드밀로 갈아서 물을 살짝 붓고 뜸을 들이는데,
바리스타의 드립에서나 보던 부풀기가 눈앞에 재현됩니다.
그리고 드립.. 비록 짧은 순간이나마 넘칠 듯 사라락 부풀어오르는 커피.

그렇게 내린 커피가 어찌 하찮을 수 있을까.
봉침 맞고 되살아난 장금의 혀마냥
입안에서 오만 가지의 미각이 춤을 춥니다.
커피 본연의 깊은 씁쓸함, 혀끝을 휘감는 단맛, 입안 가득차는 신맛,
그리고 표현할 수 없는 그 수없는 향기들.

***

삶에서 오직 단 한 번만 찾아오는 그런 순간들이 있습니다.
대개의 '첫'들이 그러하지만, 그 중에서도 좀더 각별한,
그래서 그 순간을 지나면서도, 다시는 이런 느낌은 없겠구나, 알 수 있는 그런.

얼룩덜룩 서툴고,
그래서 잘 되면 나눠먹어야지, 했던 마음은 민망함에 싹 가라앉았지만,

언젠가 최고의 커피점과 최고의 바리스타를 만나도
첫 로스팅에서 만난 커피향을 능가할 수는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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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r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