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c.2011. 12. 27. 18:41
터키에서 혹은 비행기에서 얻어온 피부질환 때문에 
입국 다음 날 바로 피부과를 찾았다.
온갖 지도 앱들을 검색하여 동네 피부과 목록을 뽑았는데, 아무래도 석연치가 않았지만,
그 중 그래도 병원 같은 느낌이 드는 곳을 찾아갔는데,
막상 가봤더니 산부인과였다. '피부과'가 아니라 '에스테틱'이라고 쓰여진 입구에서 잠시 망설였지만,

피부과는 꽤 오랫만이다.
예전에는 대개 피부비뇨기과여서 좀 민망했었는데,
산부인과랑 같이 하기도 하는구나.
호르몬 문제라면 비뇨기과보단 산부인과가 어쩌면 여자한텐 더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들었다.


어깨랑 등이 딱딱하게 굳는 증상이 지병이었던 터라,
언젠가부턴 대증요법 말고 병의 원인을 찾아 치료하는 방식에 훨씬 더 신뢰가 갔고,
그래서 양방보다는 한방을 더 선호하는 편이기도 하다. 통증혁명이라는 책도 재미있게 읽었고.

어깨통증을 상당히 완화시켜 주셨던 어떤 한의사님은
어느날인가는, 이리저리 보시더니 오늘은 등이 아니고 배가 문제네요, 라면서
쪽집게 무당처럼 말하지도 않은 증상을 짚어내는 기염을 토하기도 하셨었다.
그 동네에서 이사하면서 아쉬웠던 거 딱 하나가 그 한의원이었는데.


여튼 이러저러한 이유로,
바로 윗층의 피부비뇨기과보다는 피부과도 보는 산부인과가 나을 수도 있겠다 싶어 들어간 병원에서
간호사는, 우린 주로 비만 쪽을 하니, 피부과 진단은 윗층으로 가시라, 하지만 약처방 때문에 온 거면 처방은 해줄 수 있다 했고,
인터넷을 뒤져 어설픈 진단을 이미 내려버린 나는 처방이면 족할 듯하여 그러마 했다.
의사는 질환을 보고 간단히 진단한 다음
비타민 주사를 맞으면 빨리 낫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하고,
내 얼굴을 찬찬히 살피면서
빈혈이시네요, 했다.

전에 다니던 산부인과에서, 어지럼증이 있는데 빈혈이 아닐까요, 물어보았을 땐,
빈혈 진단은 혈액검사도 해야 하고, 일시적일 수 있는 증상만으로 단정짓긴 어렵다,고 들었던 터라,
여기저기를 눈으로 보고는 
"빈혈인데요"
라고 단정지어버리는 그 의사의 말이
우리병원은 빈혈약도 팔고, 비타민 주사도 팔고 있어요, 로 들렸다.


몇 만 원 한다는 비타민 주사를 안 맞아서 그런가, 
한 달이 지났는데도 병변 자국이 사라지질 않아서
어제 또 피부과를 찾아 헤맸다.
병원도 영리가 목적이긴 하지만, 특화된 전문가가 장사를 하려고 마음먹었다면 문외한은 속수무책이므로
이번에는 뭔가를 팔고야 말 그 병원에 다시 가고 싶진 않았고,

바로 윗층 피부비뇨기과를 찾아갔다가
입구에서
비뇨기과 전문의라는 약력을 보고 발길을 돌렸다.
비뇨기과와 피부과는 무슨 관련일까? 그 동안 갔었던 피부비뇨기과들도 다 비뇨기과 전문의였을까?

높이 뻗은 빌딩들, 어지러운 병원 간판들 속에서 헤매다가
피부과 간판 하나를 따라 들어갔다.
다행히도 피부과 전문의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다른 병원처럼 실내에는 각종 미용성형과 관련된 안내글로 넘쳐났으나,
한 편에는 간판으로 피부과 전문의의 병원을 식별하는 방법이 붙어 있었다.
전문의는 "피부과의원"이라는 간판을 쓸 수 있단다. 단어 순서도 바뀌면 안 되고.

의사는
피부과 전문의도 아니면서 피부과 명패를 달고 진료하는 병원들에 대해 분노에 가까운 불만을 토로했다.
신고하다가 지쳤다고 했다.
지칠 만큼 많다는 건 오면서 이미 본 터라
요즘 피부과는 왜 다 에스테틱이냐고 같이 열을 내고는

한움큼의 약을 사서 돌아오는 길에 생각해보니
의사와 둘이 앉아 피부과 전문의 아닌 이들이 운영하는 피부과의 실태에 대해 이야기하긴 했으나
정작 내 증상이나 약에 대해서는 설명을 제대로 못 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병원을 찾느라 헤맨 탓에 의사의 분노에 동조할 수 있었으니 망정이지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넌 왜 그런 비전문가 병원에 니발로 찾아가서 병을 제대로 시료하지 못하고 이제서야 내게로 왔느냐
하는 비난을 왜 나한테 하고 있냐고 화가 날 뻔한 상황이었다.
주니까 먹고 바르긴 하겠지만, 내 몸에 들어가 화학반응을 일으킬 이 여섯 알이나 되는 약들이 뭐가 좋은지, 약을 먹는 나는 모른다.







경과는 지나 봐야 알겠지만,
이번 피부과 순례는 그야말로 충격적이다.
몇 년 전에 산부인과에 갔다가, 제왕절개술을 하면서 지방흡입도 같이 하라는 쇼킹 광고를 보고 넘어갈 뻔했는데
이젠 점점 더 많은 병원이 건강과 생명 이외에
미용이라는 새로운 목적에 부응하는구나.
경계가 사라지는 세상이라지만
돈 안 되는 치료업과 돈 되는 미용업의 기회가 동시에 온다면, 뭘 택할까. 의사는 어느 쪽을 더 공부하고 싶을까.


약의 위험성을 인식하는,
유기체의 생명에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환자가 실험체가 아닌, 감정을 가진 사람임을 이해하는 병원을
진료과목별로 하나씩만 알면
전국 어디라도 찾아갈 텐데, 
아직 하나밖에 수집하지 못했다. 죽기 전에는 다 모을 수 있을까.


그리고
미모는 이제 경제력과 비례하겠구나. 당연한 건가.

내 몸이 길거리에 널부러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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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rte]